그 마을에 폭발사고 희생자가 또 있었다
입력 2025.02.10 (19:06)
수정 2025.02.1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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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 당시 폭발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에 대한 보도 이어갑니다.
현재까지 KBS가 확인한 희생자만 70명이 넘습니다.
10년 전 알려진 30여 명보다 곱절 넘게 늘어난 건데요.
KBS 보도를 계기로 피해 사례가 계속 확인되고 있습니다.
안서연·고성호 기자입니다.
[리포트]
69년 전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에서 폭발사고로 숨진 어린이 2명이 4·3 희생자로 인정된 지 1년이 흘렀습니다.
KBS 취재 결과, 이 마을에서 폭발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은 이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3년 전인 1953년 6월 남원읍 하례리 두수오름 인근 밭에서 폭발물을 갖고 놀던 11살 고일수가 숨지고 친척 고운근이 다쳤습니다.
[현태규/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 : "그때 친척끼리 다정했지. 폭탄 주워서 그걸 때려서 폭발하니까 그 자리에서 일수씨는 죽어버리고 운근이는 폭탄 맞아서 다 죽었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론 병원에 가서 살긴 살았다고."]
이를 증언한 현태규 할아버지 역시 또 다른 폭발사고의 피해자였습니다.
효돈초등학교 4학년이던 1957년 봄, 현 할아버지를 비롯한 아이 넷은 엿장수 둘을 따라다니며 옆 마을에서 탄피와 포탄을 주웠습니다.
불을 피우고 잠시 쉬던 찰나, 불발탄이 터지면서 친구 이남선이 죽고 이름 모를 누나가 크게 다쳤습니다.
[현태규/폭발사고 생존자 : "팡하니까 불이 그냥 터지는데 이 밭에도 불붙고 저 밭에도 불붙고 막 불이 튀어서 불붙었어요. 남자는 여기(가슴)로 맞아 이리(등)로 관통하고. 여자는 이리(옆구리)로 맞고."]
그날 폭발음은 68년이 흐르도록 현 할아버지를 놓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현태규/폭발사고 생존자 : "그때가 처음으로 죽은 사람 본 거야. 귀가 그 당시에 소리 난 게 지금도 매미 소리 나요. 왱왱. 알아듣지 못해요 지금도."]
1954년 9월 한라산 입산 금지령이 해제되면서 군경 토벌대가 철수하고도 폭발사고가 잇따르자 동네 아이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현승부/남원읍 하례2리 노인회장 : "아이고 그 순간 무섭고말고. 갑자기 동네 아이가 죽었는데 안 무서울 수가 있겠어. 그때는 충격이 좀 컸지."]
1956년 5월 수류탄을 밟고 숨진 13살 형을 지난해 어렵게 4·3희생자로 인정받은 동생은 애끓었던 날들을 토로합니다.
[김기만/폭발사고 희생자 故김동만 동생 : "4·3에 일어났을 때 당한 사람들보다도 마음이 놓여 있을 때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마음은 몇 배 더 이상 아프기 마련이죠."]
특별법에 명시된 4·3 기간을 지나 폭발사고로 희생된 사람을 4·3희생자로 결정한 건 현재까지 단 2명뿐입니다.
KBS 뉴스 안서연입니다.
촬영기자:고성호
4·3 당시 폭발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에 대한 보도 이어갑니다.
현재까지 KBS가 확인한 희생자만 70명이 넘습니다.
10년 전 알려진 30여 명보다 곱절 넘게 늘어난 건데요.
KBS 보도를 계기로 피해 사례가 계속 확인되고 있습니다.
안서연·고성호 기자입니다.
[리포트]
69년 전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에서 폭발사고로 숨진 어린이 2명이 4·3 희생자로 인정된 지 1년이 흘렀습니다.
KBS 취재 결과, 이 마을에서 폭발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은 이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3년 전인 1953년 6월 남원읍 하례리 두수오름 인근 밭에서 폭발물을 갖고 놀던 11살 고일수가 숨지고 친척 고운근이 다쳤습니다.
[현태규/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 : "그때 친척끼리 다정했지. 폭탄 주워서 그걸 때려서 폭발하니까 그 자리에서 일수씨는 죽어버리고 운근이는 폭탄 맞아서 다 죽었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론 병원에 가서 살긴 살았다고."]
이를 증언한 현태규 할아버지 역시 또 다른 폭발사고의 피해자였습니다.
효돈초등학교 4학년이던 1957년 봄, 현 할아버지를 비롯한 아이 넷은 엿장수 둘을 따라다니며 옆 마을에서 탄피와 포탄을 주웠습니다.
불을 피우고 잠시 쉬던 찰나, 불발탄이 터지면서 친구 이남선이 죽고 이름 모를 누나가 크게 다쳤습니다.
[현태규/폭발사고 생존자 : "팡하니까 불이 그냥 터지는데 이 밭에도 불붙고 저 밭에도 불붙고 막 불이 튀어서 불붙었어요. 남자는 여기(가슴)로 맞아 이리(등)로 관통하고. 여자는 이리(옆구리)로 맞고."]
그날 폭발음은 68년이 흐르도록 현 할아버지를 놓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현태규/폭발사고 생존자 : "그때가 처음으로 죽은 사람 본 거야. 귀가 그 당시에 소리 난 게 지금도 매미 소리 나요. 왱왱. 알아듣지 못해요 지금도."]
1954년 9월 한라산 입산 금지령이 해제되면서 군경 토벌대가 철수하고도 폭발사고가 잇따르자 동네 아이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현승부/남원읍 하례2리 노인회장 : "아이고 그 순간 무섭고말고. 갑자기 동네 아이가 죽었는데 안 무서울 수가 있겠어. 그때는 충격이 좀 컸지."]
1956년 5월 수류탄을 밟고 숨진 13살 형을 지난해 어렵게 4·3희생자로 인정받은 동생은 애끓었던 날들을 토로합니다.
[김기만/폭발사고 희생자 故김동만 동생 : "4·3에 일어났을 때 당한 사람들보다도 마음이 놓여 있을 때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마음은 몇 배 더 이상 아프기 마련이죠."]
특별법에 명시된 4·3 기간을 지나 폭발사고로 희생된 사람을 4·3희생자로 결정한 건 현재까지 단 2명뿐입니다.
KBS 뉴스 안서연입니다.
촬영기자: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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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2025-02-10 20: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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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 당시 폭발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에 대한 보도 이어갑니다.
현재까지 KBS가 확인한 희생자만 70명이 넘습니다.
10년 전 알려진 30여 명보다 곱절 넘게 늘어난 건데요.
KBS 보도를 계기로 피해 사례가 계속 확인되고 있습니다.
안서연·고성호 기자입니다.
[리포트]
69년 전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에서 폭발사고로 숨진 어린이 2명이 4·3 희생자로 인정된 지 1년이 흘렀습니다.
KBS 취재 결과, 이 마을에서 폭발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은 이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3년 전인 1953년 6월 남원읍 하례리 두수오름 인근 밭에서 폭발물을 갖고 놀던 11살 고일수가 숨지고 친척 고운근이 다쳤습니다.
[현태규/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 : "그때 친척끼리 다정했지. 폭탄 주워서 그걸 때려서 폭발하니까 그 자리에서 일수씨는 죽어버리고 운근이는 폭탄 맞아서 다 죽었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론 병원에 가서 살긴 살았다고."]
이를 증언한 현태규 할아버지 역시 또 다른 폭발사고의 피해자였습니다.
효돈초등학교 4학년이던 1957년 봄, 현 할아버지를 비롯한 아이 넷은 엿장수 둘을 따라다니며 옆 마을에서 탄피와 포탄을 주웠습니다.
불을 피우고 잠시 쉬던 찰나, 불발탄이 터지면서 친구 이남선이 죽고 이름 모를 누나가 크게 다쳤습니다.
[현태규/폭발사고 생존자 : "팡하니까 불이 그냥 터지는데 이 밭에도 불붙고 저 밭에도 불붙고 막 불이 튀어서 불붙었어요. 남자는 여기(가슴)로 맞아 이리(등)로 관통하고. 여자는 이리(옆구리)로 맞고."]
그날 폭발음은 68년이 흐르도록 현 할아버지를 놓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현태규/폭발사고 생존자 : "그때가 처음으로 죽은 사람 본 거야. 귀가 그 당시에 소리 난 게 지금도 매미 소리 나요. 왱왱. 알아듣지 못해요 지금도."]
1954년 9월 한라산 입산 금지령이 해제되면서 군경 토벌대가 철수하고도 폭발사고가 잇따르자 동네 아이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현승부/남원읍 하례2리 노인회장 : "아이고 그 순간 무섭고말고. 갑자기 동네 아이가 죽었는데 안 무서울 수가 있겠어. 그때는 충격이 좀 컸지."]
1956년 5월 수류탄을 밟고 숨진 13살 형을 지난해 어렵게 4·3희생자로 인정받은 동생은 애끓었던 날들을 토로합니다.
[김기만/폭발사고 희생자 故김동만 동생 : "4·3에 일어났을 때 당한 사람들보다도 마음이 놓여 있을 때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마음은 몇 배 더 이상 아프기 마련이죠."]
특별법에 명시된 4·3 기간을 지나 폭발사고로 희생된 사람을 4·3희생자로 결정한 건 현재까지 단 2명뿐입니다.
KBS 뉴스 안서연입니다.
촬영기자:고성호
4·3 당시 폭발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에 대한 보도 이어갑니다.
현재까지 KBS가 확인한 희생자만 70명이 넘습니다.
10년 전 알려진 30여 명보다 곱절 넘게 늘어난 건데요.
KBS 보도를 계기로 피해 사례가 계속 확인되고 있습니다.
안서연·고성호 기자입니다.
[리포트]
69년 전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에서 폭발사고로 숨진 어린이 2명이 4·3 희생자로 인정된 지 1년이 흘렀습니다.
KBS 취재 결과, 이 마을에서 폭발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은 이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3년 전인 1953년 6월 남원읍 하례리 두수오름 인근 밭에서 폭발물을 갖고 놀던 11살 고일수가 숨지고 친척 고운근이 다쳤습니다.
[현태규/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 : "그때 친척끼리 다정했지. 폭탄 주워서 그걸 때려서 폭발하니까 그 자리에서 일수씨는 죽어버리고 운근이는 폭탄 맞아서 다 죽었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론 병원에 가서 살긴 살았다고."]
이를 증언한 현태규 할아버지 역시 또 다른 폭발사고의 피해자였습니다.
효돈초등학교 4학년이던 1957년 봄, 현 할아버지를 비롯한 아이 넷은 엿장수 둘을 따라다니며 옆 마을에서 탄피와 포탄을 주웠습니다.
불을 피우고 잠시 쉬던 찰나, 불발탄이 터지면서 친구 이남선이 죽고 이름 모를 누나가 크게 다쳤습니다.
[현태규/폭발사고 생존자 : "팡하니까 불이 그냥 터지는데 이 밭에도 불붙고 저 밭에도 불붙고 막 불이 튀어서 불붙었어요. 남자는 여기(가슴)로 맞아 이리(등)로 관통하고. 여자는 이리(옆구리)로 맞고."]
그날 폭발음은 68년이 흐르도록 현 할아버지를 놓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현태규/폭발사고 생존자 : "그때가 처음으로 죽은 사람 본 거야. 귀가 그 당시에 소리 난 게 지금도 매미 소리 나요. 왱왱. 알아듣지 못해요 지금도."]
1954년 9월 한라산 입산 금지령이 해제되면서 군경 토벌대가 철수하고도 폭발사고가 잇따르자 동네 아이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현승부/남원읍 하례2리 노인회장 : "아이고 그 순간 무섭고말고. 갑자기 동네 아이가 죽었는데 안 무서울 수가 있겠어. 그때는 충격이 좀 컸지."]
1956년 5월 수류탄을 밟고 숨진 13살 형을 지난해 어렵게 4·3희생자로 인정받은 동생은 애끓었던 날들을 토로합니다.
[김기만/폭발사고 희생자 故김동만 동생 : "4·3에 일어났을 때 당한 사람들보다도 마음이 놓여 있을 때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마음은 몇 배 더 이상 아프기 마련이죠."]
특별법에 명시된 4·3 기간을 지나 폭발사고로 희생된 사람을 4·3희생자로 결정한 건 현재까지 단 2명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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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연 기자 asy0104@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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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호 기자 rumpiu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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