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증언] 역사의 광풍에 무너진 가족…힘겨운 살아남기
입력 2025.03.06 (19:36)
수정 2025.03.0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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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의 역사를 증언으로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김세웅 할아버지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4·3 당시 누나는 경찰에 끌려가 행방불명됐고, 아버지도 옥살이하며 가세가 기울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제주시 삼도동)무근성에서 진짜 큰 기와집, 안채도 큰 기와집이고 바깥채도 큰 기와집이고. 대지가 한 500평 되는 집에 (살았습니다.) (일본과 대만에서)사업해서 아버지가 크게 성공해서 지금도 저 납읍리 가면 사장물이라고 있습니다. 납읍 이장님이 아버지한테 와서 납읍에다 먹는 물, 식수를 하나 파달라 그러니까 좋다 얼마면 되겠냐 하니까 그 파는 거를 (부담했죠). 우리 친척들도 아버지가 집도 한 채씩 다 사주고 이제 그렇게 아버지가 참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제 위에 수자 누님이 있었는데 김수자라고 서울에서 숙명여학교를 다니다가 그때 4·3 당시엔 15살이었습니다. 수자 누님이 제주도 내려와서 그때 뭐 무슨 선거가 있었는데, 남북한 무슨 동시 선거인가 그런 걸 하는데 제주도, 남한만 하는 걸 반대한다. 동시에 선거하자. 밤에 물허벅 지고 다니면서 삐라를 뿌리다가 이제 잡혀서 경찰에. 이틀 만에 아버지가 이제 공산당, 그런 딸을 둔 아버지라고 해서 아버지까지 잡아간 겁니다."]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누님은 그러니까 행방불명됐습니다. (아버지는) 무더기로 그냥 군사 재판이니까 그냥 1년 받아서 목포 형무소에 갔다고 그렇게 연락을 받은 모양입니다. 목포 형무소 갔구나 그렇게만 하고 있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와서. 다른 아버지가 됐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정신이 이제 혼미해졌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저희들 집안에 대한 경제적인 능력도 없어져 버리고, 자식들에 대한 그런 보살핌도 없어지고."]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월급) 500원 받으면 한 번 회비 내면 석 달치 내는 거니까 나머지 것으로 이제 어머니 진짜 생활비도 조금 드리고, 저도 쓰고 그렇게 하면서 이제 중학교 야간 마치고 고등학교도 계속 마쳐서 이제 대학을 가려고 하니까 제주도에는 야간 대학이 없으니까 대학을 못 갔습니다. 제가 대학에 대한 건 한이 맺혀서, 대학 공부를 못한 것이.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야, 세웅아. 제주도 4·3을 잊어버려라. 절대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저한테 신신당부하고 아버지가 4·3에 대해서 일절 저한테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4·3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하고 하니까 저도 커서도 아버지가 4·3 피해자라는 걸 몰랐습니다. 4·3이 없었으면 뭐 저희는 뭐 이렇게 고생을 안 하고 아주 넉넉하게 아주 잘살고 있을 거죠."]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 판결문도 있는데 내란죄로 해서 징역 1년을 받았어요. (아버지 직권재심 무죄 판결 나서)진짜 너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진짜 지금까지 이 한 맺힌 것을 진짜 자식들한테도 다 얘기하고. 이제 아버지 산소에 가서 판결문을 올리고 술 한잔 올리고 제가 지금까지 소리를 내 울어보지 못했습니다. 애들도 있고 마누라도 있고 그래서 그냥 그랬지만, 그런 체면을 떠나서 한번 실컷 울어보고 싶습니다."]
4·3의 역사를 증언으로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김세웅 할아버지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4·3 당시 누나는 경찰에 끌려가 행방불명됐고, 아버지도 옥살이하며 가세가 기울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제주시 삼도동)무근성에서 진짜 큰 기와집, 안채도 큰 기와집이고 바깥채도 큰 기와집이고. 대지가 한 500평 되는 집에 (살았습니다.) (일본과 대만에서)사업해서 아버지가 크게 성공해서 지금도 저 납읍리 가면 사장물이라고 있습니다. 납읍 이장님이 아버지한테 와서 납읍에다 먹는 물, 식수를 하나 파달라 그러니까 좋다 얼마면 되겠냐 하니까 그 파는 거를 (부담했죠). 우리 친척들도 아버지가 집도 한 채씩 다 사주고 이제 그렇게 아버지가 참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제 위에 수자 누님이 있었는데 김수자라고 서울에서 숙명여학교를 다니다가 그때 4·3 당시엔 15살이었습니다. 수자 누님이 제주도 내려와서 그때 뭐 무슨 선거가 있었는데, 남북한 무슨 동시 선거인가 그런 걸 하는데 제주도, 남한만 하는 걸 반대한다. 동시에 선거하자. 밤에 물허벅 지고 다니면서 삐라를 뿌리다가 이제 잡혀서 경찰에. 이틀 만에 아버지가 이제 공산당, 그런 딸을 둔 아버지라고 해서 아버지까지 잡아간 겁니다."]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누님은 그러니까 행방불명됐습니다. (아버지는) 무더기로 그냥 군사 재판이니까 그냥 1년 받아서 목포 형무소에 갔다고 그렇게 연락을 받은 모양입니다. 목포 형무소 갔구나 그렇게만 하고 있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와서. 다른 아버지가 됐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정신이 이제 혼미해졌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저희들 집안에 대한 경제적인 능력도 없어져 버리고, 자식들에 대한 그런 보살핌도 없어지고."]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월급) 500원 받으면 한 번 회비 내면 석 달치 내는 거니까 나머지 것으로 이제 어머니 진짜 생활비도 조금 드리고, 저도 쓰고 그렇게 하면서 이제 중학교 야간 마치고 고등학교도 계속 마쳐서 이제 대학을 가려고 하니까 제주도에는 야간 대학이 없으니까 대학을 못 갔습니다. 제가 대학에 대한 건 한이 맺혀서, 대학 공부를 못한 것이.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야, 세웅아. 제주도 4·3을 잊어버려라. 절대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저한테 신신당부하고 아버지가 4·3에 대해서 일절 저한테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4·3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하고 하니까 저도 커서도 아버지가 4·3 피해자라는 걸 몰랐습니다. 4·3이 없었으면 뭐 저희는 뭐 이렇게 고생을 안 하고 아주 넉넉하게 아주 잘살고 있을 거죠."]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 판결문도 있는데 내란죄로 해서 징역 1년을 받았어요. (아버지 직권재심 무죄 판결 나서)진짜 너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진짜 지금까지 이 한 맺힌 것을 진짜 자식들한테도 다 얘기하고. 이제 아버지 산소에 가서 판결문을 올리고 술 한잔 올리고 제가 지금까지 소리를 내 울어보지 못했습니다. 애들도 있고 마누라도 있고 그래서 그냥 그랬지만, 그런 체면을 떠나서 한번 실컷 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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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5-03-06 19: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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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4·3의 역사를 증언으로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김세웅 할아버지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4·3 당시 누나는 경찰에 끌려가 행방불명됐고, 아버지도 옥살이하며 가세가 기울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제주시 삼도동)무근성에서 진짜 큰 기와집, 안채도 큰 기와집이고 바깥채도 큰 기와집이고. 대지가 한 500평 되는 집에 (살았습니다.) (일본과 대만에서)사업해서 아버지가 크게 성공해서 지금도 저 납읍리 가면 사장물이라고 있습니다. 납읍 이장님이 아버지한테 와서 납읍에다 먹는 물, 식수를 하나 파달라 그러니까 좋다 얼마면 되겠냐 하니까 그 파는 거를 (부담했죠). 우리 친척들도 아버지가 집도 한 채씩 다 사주고 이제 그렇게 아버지가 참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제 위에 수자 누님이 있었는데 김수자라고 서울에서 숙명여학교를 다니다가 그때 4·3 당시엔 15살이었습니다. 수자 누님이 제주도 내려와서 그때 뭐 무슨 선거가 있었는데, 남북한 무슨 동시 선거인가 그런 걸 하는데 제주도, 남한만 하는 걸 반대한다. 동시에 선거하자. 밤에 물허벅 지고 다니면서 삐라를 뿌리다가 이제 잡혀서 경찰에. 이틀 만에 아버지가 이제 공산당, 그런 딸을 둔 아버지라고 해서 아버지까지 잡아간 겁니다."]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누님은 그러니까 행방불명됐습니다. (아버지는) 무더기로 그냥 군사 재판이니까 그냥 1년 받아서 목포 형무소에 갔다고 그렇게 연락을 받은 모양입니다. 목포 형무소 갔구나 그렇게만 하고 있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와서. 다른 아버지가 됐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정신이 이제 혼미해졌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저희들 집안에 대한 경제적인 능력도 없어져 버리고, 자식들에 대한 그런 보살핌도 없어지고."]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월급) 500원 받으면 한 번 회비 내면 석 달치 내는 거니까 나머지 것으로 이제 어머니 진짜 생활비도 조금 드리고, 저도 쓰고 그렇게 하면서 이제 중학교 야간 마치고 고등학교도 계속 마쳐서 이제 대학을 가려고 하니까 제주도에는 야간 대학이 없으니까 대학을 못 갔습니다. 제가 대학에 대한 건 한이 맺혀서, 대학 공부를 못한 것이.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야, 세웅아. 제주도 4·3을 잊어버려라. 절대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저한테 신신당부하고 아버지가 4·3에 대해서 일절 저한테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4·3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하고 하니까 저도 커서도 아버지가 4·3 피해자라는 걸 몰랐습니다. 4·3이 없었으면 뭐 저희는 뭐 이렇게 고생을 안 하고 아주 넉넉하게 아주 잘살고 있을 거죠."]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 판결문도 있는데 내란죄로 해서 징역 1년을 받았어요. (아버지 직권재심 무죄 판결 나서)진짜 너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진짜 지금까지 이 한 맺힌 것을 진짜 자식들한테도 다 얘기하고. 이제 아버지 산소에 가서 판결문을 올리고 술 한잔 올리고 제가 지금까지 소리를 내 울어보지 못했습니다. 애들도 있고 마누라도 있고 그래서 그냥 그랬지만, 그런 체면을 떠나서 한번 실컷 울어보고 싶습니다."]
4·3의 역사를 증언으로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김세웅 할아버지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4·3 당시 누나는 경찰에 끌려가 행방불명됐고, 아버지도 옥살이하며 가세가 기울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제주시 삼도동)무근성에서 진짜 큰 기와집, 안채도 큰 기와집이고 바깥채도 큰 기와집이고. 대지가 한 500평 되는 집에 (살았습니다.) (일본과 대만에서)사업해서 아버지가 크게 성공해서 지금도 저 납읍리 가면 사장물이라고 있습니다. 납읍 이장님이 아버지한테 와서 납읍에다 먹는 물, 식수를 하나 파달라 그러니까 좋다 얼마면 되겠냐 하니까 그 파는 거를 (부담했죠). 우리 친척들도 아버지가 집도 한 채씩 다 사주고 이제 그렇게 아버지가 참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제 위에 수자 누님이 있었는데 김수자라고 서울에서 숙명여학교를 다니다가 그때 4·3 당시엔 15살이었습니다. 수자 누님이 제주도 내려와서 그때 뭐 무슨 선거가 있었는데, 남북한 무슨 동시 선거인가 그런 걸 하는데 제주도, 남한만 하는 걸 반대한다. 동시에 선거하자. 밤에 물허벅 지고 다니면서 삐라를 뿌리다가 이제 잡혀서 경찰에. 이틀 만에 아버지가 이제 공산당, 그런 딸을 둔 아버지라고 해서 아버지까지 잡아간 겁니다."]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누님은 그러니까 행방불명됐습니다. (아버지는) 무더기로 그냥 군사 재판이니까 그냥 1년 받아서 목포 형무소에 갔다고 그렇게 연락을 받은 모양입니다. 목포 형무소 갔구나 그렇게만 하고 있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와서. 다른 아버지가 됐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정신이 이제 혼미해졌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저희들 집안에 대한 경제적인 능력도 없어져 버리고, 자식들에 대한 그런 보살핌도 없어지고."]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월급) 500원 받으면 한 번 회비 내면 석 달치 내는 거니까 나머지 것으로 이제 어머니 진짜 생활비도 조금 드리고, 저도 쓰고 그렇게 하면서 이제 중학교 야간 마치고 고등학교도 계속 마쳐서 이제 대학을 가려고 하니까 제주도에는 야간 대학이 없으니까 대학을 못 갔습니다. 제가 대학에 대한 건 한이 맺혀서, 대학 공부를 못한 것이.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야, 세웅아. 제주도 4·3을 잊어버려라. 절대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저한테 신신당부하고 아버지가 4·3에 대해서 일절 저한테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4·3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하고 하니까 저도 커서도 아버지가 4·3 피해자라는 걸 몰랐습니다. 4·3이 없었으면 뭐 저희는 뭐 이렇게 고생을 안 하고 아주 넉넉하게 아주 잘살고 있을 거죠."]
[김세웅/4·3 희생자 유족 : "(아버지) 판결문도 있는데 내란죄로 해서 징역 1년을 받았어요. (아버지 직권재심 무죄 판결 나서)진짜 너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진짜 지금까지 이 한 맺힌 것을 진짜 자식들한테도 다 얘기하고. 이제 아버지 산소에 가서 판결문을 올리고 술 한잔 올리고 제가 지금까지 소리를 내 울어보지 못했습니다. 애들도 있고 마누라도 있고 그래서 그냥 그랬지만, 그런 체면을 떠나서 한번 실컷 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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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두 기자 yyd9212@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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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윤 기자 jaeyu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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