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도 TSMC처럼 망하던 기업 ‘세계1위’ 만들 수 있나

입력 2025.01.17 (12:00) 수정 2025.01.17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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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매년 70%씩 10년 동안 성장하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첫 해 매출이 300억 원이었다면 10년 뒤 매출은 6조 원이 됩니다. 이런 속도로 사업을 성장시키는 게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그 CEO는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요?

그런데 만약, 남의 회사를 그렇게 성장시켜 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자선 사업가가 어디 있냐? 는 소리를 듣겠죠. 그런데 있습니다. 그런 사업, 그리고 그런 비즈니스 모델 이야기와 삼성의 어두운 미래를 함께 비춰봅니다.


■망해가던 기업 엔비디아, 느닷없이 매년 70% 성장

엔비디아는 MS가 윈도95를 내놓으면서 망할 뻔했습니다. 1996년입니다. 새 제품을 거의 다 만들어놨는데(NV2), 갑자기 윈도95가 출시돼서 세상을 지배한 겁니다. 비극적이게도 NV2는 윈도95와 호환되지 않았습니다. 창업 3년 차 스타트업은 그대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우선 일본 게임업체 SEGA가 그런 엔비디아를 구합니다. SEGA는 당초 NV2가 나오면 사주기로 한 회사였습니다. 물건이 안 나왔으니, 돈을 줄 필요는 없었는데, 당시 30대이던 청년 CEO 젠슨 황이 사정하자 투자 형식으로 500만 달러를 줍니다. 엔비디아는 그 돈을 받고 6개월을 연명하면서 다음 제품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성공합니다.

그런 뒤 10년 동안 연평균(CAGR) 70% 성장합니다. 그리고 2025년, 세계 최고의 AI 하드웨어 기업이 됩니다.

월스트리트저널(“The 84-Year-Old Man Who Saved Nvidia”)을 보면 젠슨은 망할 뻔한 자신을 구해준 이 일본회사 SEGA, 그리고 그 미주지사 CEO 이마지리 쇼이치로에 무척 감사합니다.



■ 젠슨 황이 "존경, 또 존경"하는 사람

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습니다. 젠슨이 세상에서 가장 감사하는 사람, 인생의 사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2007년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땐 말이죠, 1997년인데, 당시 엔비디아 매출은 2,700만 달러였어요. 직원은 100명이었고요. 그런데 당신을 만난 바로 그 이듬해 매출은 127% 성장했고, 그다음 해도 거의 100% 성장했어요. 그때부터 오늘(2007년)까지 약 10년 동안 저희 엔비디아는 연평균 70% 성장했어요”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컴퓨터 역사박물관(Computer History Museum)에서 나눈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서 젠슨은 엔비디아의 성공이 대화 상대인 ‘이 사람’이 있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참고로 엔비디아 직원이 아닙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어떻게 남의 기업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만들어준 걸까요? 그런 일이 가능하긴 한 걸까요?

■ 대신 만들어줍니다, 아이디어만 내놓으세요

짐작하셨나요? 대화 상대인 ‘이 사람’은 모리스 창, TSMC의 CEO입니다. 무슨 마법을 부렸느냐? 대신 만들어줬습니다. 공장이 없는 스타트업 엔비디아(팹리스, Fabless)를 위해 대신 공장을 짓고 대신 생산해 줬습니다. 파운드리입니다.

2022년 미국 TSMC 공장 건설 현장2022년 미국 TSMC 공장 건설 현장

이 파운드리 공장을 이용하면 ‘불량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무조건 만들어줍니다. 제조 실패의 불확실성, 리스크는 다 떠안아 줍니다. 고객 주문이 갑자기 늘거나 줄어도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인기가 치솟아 200% 늘면 그만큼 더 만들어 줍니다. 시장 상황이 나빠 주문이 50% 감소하면 그만큼 적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됩니다. 추가 설비투자나, 생산 규모 축소로 인한 유휴 설비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TSMC는 고객을 위해 어마어마한 자본을 대신 투자해 ‘극단적인 생산 유연성’을 준비해 줍니다.

엔비디아는 혁신만 하면 됩니다. 혁신적인 설계만 해내서 고객의 관심만 끌 수 있으면, 그 뒤 자본 집약적인 부문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젠슨 입장에선 사업이 얼마나 간단해졌겠습니까. 잘하는 것만 하면 되고, 해본 적 없는 건 이 회사에 다 맡기면 되니까. 그게 엔비디아라는 팹리스의 성공 비결이라면, TSMC는 정말 마법 같은 회사인 겁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한때 IT 세상을 지배한 반도체는 CPU입니다. 인텔이 주도했습니다만, 이제는 그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죠. 왜 그렇게 되었느냐? 더 미세한 제품을 못 만들어서입니다. 7나노 이후로 더 미세한 선단 공정에 한참 동안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더 좋은 제품을 내놓는 데 실패했단 얘기입니다.

대신 세상을 지배하는 회사는 어디냐? 이제 부문별로 다릅니다. 모바일 칩(AP)는 애플과 퀄컴, 미디어텍 정도가 지배합니다. 클라우드 서버용 구동칩은 클라우드 서비스를 지배하는 아마존이 잘합니다. 머신러닝 칩? 그걸 가장 잘하는 구글이 잘합니다. AI 칩? 엔비디아가 잘합니다.

그리고 이 회사들의 특징은요? 자체 칩 생산 공장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선 모두 일종의 팹리스(Fabless)라 부를 수 있습니다. 설계만 하고 직접 만드는 것은 모두 TSMC에 맡깁니다. TSMC는 오직 제조에만 집중해 더 미세한 선단 공정의 길을 대신 열어줍니다.

바로 팹리스-파운드리 분업에 기반한 <파운드리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사실 삼성과 비교해서 이 TSMC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참고해 보시죠.

[연관 기사] 첨단 반도체 ‘승자독식’은 TSMC 몫?…삼성의 미래는?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103199

■설계도보다 더 잘 만들어드리죠, 가져만 오세요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석학 중 한 분이 말했습니다.

“중국 출장 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직 미·중 대결이 본격화되기 전입니다. 미국인인데 당시 중국 기업에서 반도체 조언을 해주던 양반인데, TSMC 일화를 하나 들려주더군요.

당시 애플이 AP를 설계해서 TSMC에 맡겼답니다. 그런데 공장에서 불량품이 나오더랍니다. 큰일 난 거죠. TSMC는 제일 큰 고객인데 얼마나 난리가 났겠습니까. 그런데 분석해 봤더니 애플 잘못이었던 겁니다. 설계 문제였죠. TSMC가 애플에 연락했답니다. 뭐라고 했을까요?

‘우리 엔지니어 50명을 애플 본사에 파견할게, 받아주면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해 줄게’

애플 탓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빨리 해결하자, 내가 도와준다고 한 겁니다. 결국 설계를 바꿔 해결했대요.

국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요? 고객한테 전화해서 ‘설계 잘못이다, 내(제조사) 잘못 아니다’라고 책임 소재 가리는 데 급급했겠죠. 저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TSMC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교수님은 이렇게 짧게 반문합니다. “이런 판에서 삼성에 맡기겠어요?”


팹리스와 파운드리 모델의 본질이 여기 있습니다. 파운드리는 설계도대로 정확하게 만드는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고객이 제시한 설계도보다 더 잘 만들어줘야’ 합니다.

고객(팹리스)은 하드웨어를 잘 모릅니다. 컴퓨터 안에서 설계만 하죠. 실제 웨이퍼 공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래서 가상의 그래픽으로는 구현할 수 있는 설계가 실제로는 왜 만들기 어려운지 모릅니다.

파운드리는 바로 이런 고객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다양한 레시피와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이 될 수 있도록 ‘개조’해줘야 합니다. 혼자서 못 하겠으면 주변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업들과 협력도 해야 합니다. 끝없이 실패하고, 소통하고, 다시 시도해야 합니다.

이건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철학의 문제입니다. 고객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이 고객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문제입니다.

■ 그런데 삼성은

빨리해 내고 싶어 서둘렀습니다. 2019년 이재용 당시 부회장은 2030 파운드리 1위 선언을 합니다. 당시 점유율은 TSMC 48%대 삼성 19.1%였습니다. 아직 멀었지만, 추격하는 추세였죠.

100조 원대 과감한 투자도 선언합니다. 선언과 동시에 3나노 GAA 공정 도입을 알리고, 그에 따라 설계할 수 있게 해주는 키트도 배포합니다. 그리고 3년 뒤, 실제 공정 개발에도 성공합니다.

하지만 고객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파운드리는 고객의 제품을 만들어주기 위해 존재하지 기술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기술을 모으고 솔루션을 종합해서 ‘주문한 제품이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고객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제품이 나오겠습니까.

기술은 있지만 경험이 없으니, 수율이 좋을 수도 없습니다. 이건 2022년 퀄컴이 떠나가면서 직간접적으로 확인됐습니다. 당시 4나노 공정에서 삼성은 '스냅드래곤' 양산에서 발열 등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결과가 발열이 많은 AP였고, GOS라는 프로그램을 통한 눈 가림이였죠. 이 경험은 퀄컴에 깊은 실망을 안깁니다. 애플의 문제를 대신 해결한 TSMC와 제조에서 한계를 노출하고 눈 가림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한 삼성을 비교해 보시죠.

[연관 기사] ‘삼성의 기술 우위는 끝나버렸다’ GOS 사태의 본질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419301


퀄컴은 삼성을 떠나 TSMC로 갔고, 스냅드래곤 칩의 성능은 개선됐습니다. 사실 퀄컴의 칩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주는 회사가 삼성이었고, 삼성은 퀄컴의 최신 칩을 만들어주는 회사였죠. 두 회사는 완벽한 파트너였습니다. 그런 파트너가 최신 칩은 삼성을 떠나 만들고 있습니다. 돌아올 기미도 없습니다. 그게 2022년 초이고, GAA 3나노 공정은 그해 후반에 나왔습니다.

잠재적 고객들은 생각해야 하죠. 기존 4나노에서도 죽을 쒔는데 3나노를 잘할까? 잘하는 TSMC를 떠나 불확실한 삼성으로 갈 이유가 있을까? 낮은 수율을 보고는 고객들은 삼성에 일감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 결과 2019년 1분기 48대 19이던 격차는 2024년 3분기 기준 65대 9가 됐습니다. (트랜드포스)

■ 삼성은 망하던 기업을 세계 1위 만들 수 있나? 아니면 파운드리는 왜 하려 하나?

TSMC는 엔비디아를 구하고 자신은 세계 최고 기업의 대열에 올랐습니다. 망해가던 기업과 자신이 동시에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이 됐습니다. 과거에 '아이디어는 있지만 돈이 없어서' 칩을 만들 엄두도 못 내던 회사들이 하나둘 TSMC를 찾아 첨단 칩을 만들어 팝니다. 그러자 고객들이 몰려듭니다. 심지어 AMD는 있던 공장도 팔아버리고 물건을 TSMC에 맡깁니다. 그러니까, 고객을 먼저 성공시키고, 그다음에 자신도 주목받는 기업이 된 겁니다.

TSMC는 시가총액이 8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약 4배입니다.

운이 좋아 이렇게 된 게 아닙니다. 비전과 철학이 있는 회사입니다. 오랜 시간 파운드리를 하며 기술과 협력관계를 쌓았고, 주변에는 탄탄한 후공정 생태계가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 삼성은 이 파운드리를 우습게 봤습니다. 삼성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텔도 우습게 봤습니다. 왜냐, 작은 비즈니스였습니다. 과거의 파운드리 위상은 아래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의 말을 들으면 바로 이해가 갑니다.

"300밀리미터 웨이퍼 한 장에 삼성처럼 메모리 칩을 만들어 팔면 장당 3,000~4,000달러를 법니다. 인텔처럼 CPU를 만들면 4,000~5,000 달러를 법니다. 그런데 TSMC처럼 파운드리를 하면요? 2,000달러 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투자를 해서 파운드리가 하고 싶어요? 메모리가 하고 싶어요? 할 수 있으면 CPU가 가장 하고 싶지만, 그게 안 되면 파운드리보다는 메모리죠.

삼성과 인텔이 과거에는 파운드리를 그렇게 봤습니다. TSMC는 둘 다 못하니까 파운드리를 한 겁니다. 덩치는 작지만, 원가절감하고 효율화하면 이익은 꽤 났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변했습니다. 첨단 파운드리가 제일 비쌉니다. 심지어 TSMC가 앞으로 내놓을 2나노 공정은 웨이퍼 한 장에 3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사실 삼성은 그래서 이 파운드리가 하고 싶습니다. 더 비싸서요. 실제로 삼성은 저부가가치 파운드리는 제외하고 고부가가치만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파운드리의 철학과 삼성전자의 목표가 갈라졌다고 봅니다. 파운드리는 '내가 부자가 되려고' 하는 동기에 앞서서 '고객의 꿈을 실현하려는 철학'이 필요한 사업이거든요.

하지만, 삼성은 '내가 첨단 파운드리 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걸 하려면 선단 공정 기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기술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죠. 사실은 더 거대한 철학적 의미 부여, 자세의 전환이 필요했는데 말이죠.

당장은 메모리 경쟁력을 회복하는 데 전력하느라 파운드리에 역량을 쏟기 어렵겠지만, 언젠가 다시 TSMC 파운드리 아성에 도전하려 한다면 바로 이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할 겁니다.

삼성은 왜 파운드리를 하려 합니까? 망해가는 기업과 협력해 그 기업을 1위가 되게 만드는 파운드리를 할 생각이 있습니까?

위기의 삼성을 조망하는 연속기사입니다. 다양한 기업과 비교하고, 여러 전문가의 분석을 경청하며 삼성의 현주소를 살핍니다. 구독해두시면, 1월 한 달 동안 삼성 위기의 이유와 극복의 단초를 살필 수 있습니다.

① [D램] 젠슨, 삼성이 왜 HBM을 새로 설계해야 하죠?
② [모바일] 애플과 삼성의 격차, 이제는 17배
③ [파운드리] 삼성도 TSMC처럼 망하던 기업 '세계1위' 만들 수 있나
(추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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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도 TSMC처럼 망하던 기업 ‘세계1위’ 만들 수 있나
    • 입력 2025-01-17 12:00:53
    • 수정2025-01-17 12: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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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매년 70%씩 10년 동안 성장하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첫 해 매출이 300억 원이었다면 10년 뒤 매출은 6조 원이 됩니다. 이런 속도로 사업을 성장시키는 게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그 CEO는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요?

그런데 만약, 남의 회사를 그렇게 성장시켜 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자선 사업가가 어디 있냐? 는 소리를 듣겠죠. 그런데 있습니다. 그런 사업, 그리고 그런 비즈니스 모델 이야기와 삼성의 어두운 미래를 함께 비춰봅니다.


■망해가던 기업 엔비디아, 느닷없이 매년 70% 성장

엔비디아는 MS가 윈도95를 내놓으면서 망할 뻔했습니다. 1996년입니다. 새 제품을 거의 다 만들어놨는데(NV2), 갑자기 윈도95가 출시돼서 세상을 지배한 겁니다. 비극적이게도 NV2는 윈도95와 호환되지 않았습니다. 창업 3년 차 스타트업은 그대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우선 일본 게임업체 SEGA가 그런 엔비디아를 구합니다. SEGA는 당초 NV2가 나오면 사주기로 한 회사였습니다. 물건이 안 나왔으니, 돈을 줄 필요는 없었는데, 당시 30대이던 청년 CEO 젠슨 황이 사정하자 투자 형식으로 500만 달러를 줍니다. 엔비디아는 그 돈을 받고 6개월을 연명하면서 다음 제품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성공합니다.

그런 뒤 10년 동안 연평균(CAGR) 70% 성장합니다. 그리고 2025년, 세계 최고의 AI 하드웨어 기업이 됩니다.

월스트리트저널(“The 84-Year-Old Man Who Saved Nvidia”)을 보면 젠슨은 망할 뻔한 자신을 구해준 이 일본회사 SEGA, 그리고 그 미주지사 CEO 이마지리 쇼이치로에 무척 감사합니다.



■ 젠슨 황이 "존경, 또 존경"하는 사람

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습니다. 젠슨이 세상에서 가장 감사하는 사람, 인생의 사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2007년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땐 말이죠, 1997년인데, 당시 엔비디아 매출은 2,700만 달러였어요. 직원은 100명이었고요. 그런데 당신을 만난 바로 그 이듬해 매출은 127% 성장했고, 그다음 해도 거의 100% 성장했어요. 그때부터 오늘(2007년)까지 약 10년 동안 저희 엔비디아는 연평균 70% 성장했어요”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컴퓨터 역사박물관(Computer History Museum)에서 나눈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서 젠슨은 엔비디아의 성공이 대화 상대인 ‘이 사람’이 있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참고로 엔비디아 직원이 아닙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어떻게 남의 기업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만들어준 걸까요? 그런 일이 가능하긴 한 걸까요?

■ 대신 만들어줍니다, 아이디어만 내놓으세요

짐작하셨나요? 대화 상대인 ‘이 사람’은 모리스 창, TSMC의 CEO입니다. 무슨 마법을 부렸느냐? 대신 만들어줬습니다. 공장이 없는 스타트업 엔비디아(팹리스, Fabless)를 위해 대신 공장을 짓고 대신 생산해 줬습니다. 파운드리입니다.

2022년 미국 TSMC 공장 건설 현장
이 파운드리 공장을 이용하면 ‘불량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무조건 만들어줍니다. 제조 실패의 불확실성, 리스크는 다 떠안아 줍니다. 고객 주문이 갑자기 늘거나 줄어도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인기가 치솟아 200% 늘면 그만큼 더 만들어 줍니다. 시장 상황이 나빠 주문이 50% 감소하면 그만큼 적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됩니다. 추가 설비투자나, 생산 규모 축소로 인한 유휴 설비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TSMC는 고객을 위해 어마어마한 자본을 대신 투자해 ‘극단적인 생산 유연성’을 준비해 줍니다.

엔비디아는 혁신만 하면 됩니다. 혁신적인 설계만 해내서 고객의 관심만 끌 수 있으면, 그 뒤 자본 집약적인 부문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젠슨 입장에선 사업이 얼마나 간단해졌겠습니까. 잘하는 것만 하면 되고, 해본 적 없는 건 이 회사에 다 맡기면 되니까. 그게 엔비디아라는 팹리스의 성공 비결이라면, TSMC는 정말 마법 같은 회사인 겁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한때 IT 세상을 지배한 반도체는 CPU입니다. 인텔이 주도했습니다만, 이제는 그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죠. 왜 그렇게 되었느냐? 더 미세한 제품을 못 만들어서입니다. 7나노 이후로 더 미세한 선단 공정에 한참 동안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더 좋은 제품을 내놓는 데 실패했단 얘기입니다.

대신 세상을 지배하는 회사는 어디냐? 이제 부문별로 다릅니다. 모바일 칩(AP)는 애플과 퀄컴, 미디어텍 정도가 지배합니다. 클라우드 서버용 구동칩은 클라우드 서비스를 지배하는 아마존이 잘합니다. 머신러닝 칩? 그걸 가장 잘하는 구글이 잘합니다. AI 칩? 엔비디아가 잘합니다.

그리고 이 회사들의 특징은요? 자체 칩 생산 공장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선 모두 일종의 팹리스(Fabless)라 부를 수 있습니다. 설계만 하고 직접 만드는 것은 모두 TSMC에 맡깁니다. TSMC는 오직 제조에만 집중해 더 미세한 선단 공정의 길을 대신 열어줍니다.

바로 팹리스-파운드리 분업에 기반한 <파운드리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사실 삼성과 비교해서 이 TSMC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참고해 보시죠.

[연관 기사] 첨단 반도체 ‘승자독식’은 TSMC 몫?…삼성의 미래는?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103199

■설계도보다 더 잘 만들어드리죠, 가져만 오세요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석학 중 한 분이 말했습니다.

“중국 출장 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직 미·중 대결이 본격화되기 전입니다. 미국인인데 당시 중국 기업에서 반도체 조언을 해주던 양반인데, TSMC 일화를 하나 들려주더군요.

당시 애플이 AP를 설계해서 TSMC에 맡겼답니다. 그런데 공장에서 불량품이 나오더랍니다. 큰일 난 거죠. TSMC는 제일 큰 고객인데 얼마나 난리가 났겠습니까. 그런데 분석해 봤더니 애플 잘못이었던 겁니다. 설계 문제였죠. TSMC가 애플에 연락했답니다. 뭐라고 했을까요?

‘우리 엔지니어 50명을 애플 본사에 파견할게, 받아주면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해 줄게’

애플 탓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빨리 해결하자, 내가 도와준다고 한 겁니다. 결국 설계를 바꿔 해결했대요.

국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요? 고객한테 전화해서 ‘설계 잘못이다, 내(제조사) 잘못 아니다’라고 책임 소재 가리는 데 급급했겠죠. 저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TSMC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교수님은 이렇게 짧게 반문합니다. “이런 판에서 삼성에 맡기겠어요?”


팹리스와 파운드리 모델의 본질이 여기 있습니다. 파운드리는 설계도대로 정확하게 만드는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고객이 제시한 설계도보다 더 잘 만들어줘야’ 합니다.

고객(팹리스)은 하드웨어를 잘 모릅니다. 컴퓨터 안에서 설계만 하죠. 실제 웨이퍼 공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래서 가상의 그래픽으로는 구현할 수 있는 설계가 실제로는 왜 만들기 어려운지 모릅니다.

파운드리는 바로 이런 고객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다양한 레시피와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이 될 수 있도록 ‘개조’해줘야 합니다. 혼자서 못 하겠으면 주변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업들과 협력도 해야 합니다. 끝없이 실패하고, 소통하고, 다시 시도해야 합니다.

이건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철학의 문제입니다. 고객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이 고객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문제입니다.

■ 그런데 삼성은

빨리해 내고 싶어 서둘렀습니다. 2019년 이재용 당시 부회장은 2030 파운드리 1위 선언을 합니다. 당시 점유율은 TSMC 48%대 삼성 19.1%였습니다. 아직 멀었지만, 추격하는 추세였죠.

100조 원대 과감한 투자도 선언합니다. 선언과 동시에 3나노 GAA 공정 도입을 알리고, 그에 따라 설계할 수 있게 해주는 키트도 배포합니다. 그리고 3년 뒤, 실제 공정 개발에도 성공합니다.

하지만 고객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파운드리는 고객의 제품을 만들어주기 위해 존재하지 기술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기술을 모으고 솔루션을 종합해서 ‘주문한 제품이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고객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제품이 나오겠습니까.

기술은 있지만 경험이 없으니, 수율이 좋을 수도 없습니다. 이건 2022년 퀄컴이 떠나가면서 직간접적으로 확인됐습니다. 당시 4나노 공정에서 삼성은 '스냅드래곤' 양산에서 발열 등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결과가 발열이 많은 AP였고, GOS라는 프로그램을 통한 눈 가림이였죠. 이 경험은 퀄컴에 깊은 실망을 안깁니다. 애플의 문제를 대신 해결한 TSMC와 제조에서 한계를 노출하고 눈 가림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한 삼성을 비교해 보시죠.

[연관 기사] ‘삼성의 기술 우위는 끝나버렸다’ GOS 사태의 본질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419301


퀄컴은 삼성을 떠나 TSMC로 갔고, 스냅드래곤 칩의 성능은 개선됐습니다. 사실 퀄컴의 칩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주는 회사가 삼성이었고, 삼성은 퀄컴의 최신 칩을 만들어주는 회사였죠. 두 회사는 완벽한 파트너였습니다. 그런 파트너가 최신 칩은 삼성을 떠나 만들고 있습니다. 돌아올 기미도 없습니다. 그게 2022년 초이고, GAA 3나노 공정은 그해 후반에 나왔습니다.

잠재적 고객들은 생각해야 하죠. 기존 4나노에서도 죽을 쒔는데 3나노를 잘할까? 잘하는 TSMC를 떠나 불확실한 삼성으로 갈 이유가 있을까? 낮은 수율을 보고는 고객들은 삼성에 일감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 결과 2019년 1분기 48대 19이던 격차는 2024년 3분기 기준 65대 9가 됐습니다. (트랜드포스)

■ 삼성은 망하던 기업을 세계 1위 만들 수 있나? 아니면 파운드리는 왜 하려 하나?

TSMC는 엔비디아를 구하고 자신은 세계 최고 기업의 대열에 올랐습니다. 망해가던 기업과 자신이 동시에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이 됐습니다. 과거에 '아이디어는 있지만 돈이 없어서' 칩을 만들 엄두도 못 내던 회사들이 하나둘 TSMC를 찾아 첨단 칩을 만들어 팝니다. 그러자 고객들이 몰려듭니다. 심지어 AMD는 있던 공장도 팔아버리고 물건을 TSMC에 맡깁니다. 그러니까, 고객을 먼저 성공시키고, 그다음에 자신도 주목받는 기업이 된 겁니다.

TSMC는 시가총액이 8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약 4배입니다.

운이 좋아 이렇게 된 게 아닙니다. 비전과 철학이 있는 회사입니다. 오랜 시간 파운드리를 하며 기술과 협력관계를 쌓았고, 주변에는 탄탄한 후공정 생태계가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 삼성은 이 파운드리를 우습게 봤습니다. 삼성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텔도 우습게 봤습니다. 왜냐, 작은 비즈니스였습니다. 과거의 파운드리 위상은 아래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의 말을 들으면 바로 이해가 갑니다.

"300밀리미터 웨이퍼 한 장에 삼성처럼 메모리 칩을 만들어 팔면 장당 3,000~4,000달러를 법니다. 인텔처럼 CPU를 만들면 4,000~5,000 달러를 법니다. 그런데 TSMC처럼 파운드리를 하면요? 2,000달러 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투자를 해서 파운드리가 하고 싶어요? 메모리가 하고 싶어요? 할 수 있으면 CPU가 가장 하고 싶지만, 그게 안 되면 파운드리보다는 메모리죠.

삼성과 인텔이 과거에는 파운드리를 그렇게 봤습니다. TSMC는 둘 다 못하니까 파운드리를 한 겁니다. 덩치는 작지만, 원가절감하고 효율화하면 이익은 꽤 났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변했습니다. 첨단 파운드리가 제일 비쌉니다. 심지어 TSMC가 앞으로 내놓을 2나노 공정은 웨이퍼 한 장에 3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사실 삼성은 그래서 이 파운드리가 하고 싶습니다. 더 비싸서요. 실제로 삼성은 저부가가치 파운드리는 제외하고 고부가가치만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파운드리의 철학과 삼성전자의 목표가 갈라졌다고 봅니다. 파운드리는 '내가 부자가 되려고' 하는 동기에 앞서서 '고객의 꿈을 실현하려는 철학'이 필요한 사업이거든요.

하지만, 삼성은 '내가 첨단 파운드리 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걸 하려면 선단 공정 기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기술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죠. 사실은 더 거대한 철학적 의미 부여, 자세의 전환이 필요했는데 말이죠.

당장은 메모리 경쟁력을 회복하는 데 전력하느라 파운드리에 역량을 쏟기 어렵겠지만, 언젠가 다시 TSMC 파운드리 아성에 도전하려 한다면 바로 이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할 겁니다.

삼성은 왜 파운드리를 하려 합니까? 망해가는 기업과 협력해 그 기업을 1위가 되게 만드는 파운드리를 할 생각이 있습니까?

위기의 삼성을 조망하는 연속기사입니다. 다양한 기업과 비교하고, 여러 전문가의 분석을 경청하며 삼성의 현주소를 살핍니다. 구독해두시면, 1월 한 달 동안 삼성 위기의 이유와 극복의 단초를 살필 수 있습니다.

① [D램] 젠슨, 삼성이 왜 HBM을 새로 설계해야 하죠?
② [모바일] 애플과 삼성의 격차, 이제는 17배
③ [파운드리] 삼성도 TSMC처럼 망하던 기업 '세계1위' 만들 수 있나
(추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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